다시 여행 갈 날을 떠올리며,
RIMOWA

알루미늄 케이스 가방으로 여행 업계의 슈퍼스타로 등장했던 리모와.
소비자들이 기꺼이 고가의 가격을 지불하고
이 가방을 구입하는 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여행객들이 사랑하는 여행 가방
이제 여행은 추억 혹은 과거 기억 소환의 소재로 남아 있다. 내가 3년 전에 어딜 갔었지, 그때 거기 참 좋았었는데 등등. 코로나 끝나면 떠나고 싶은 여행지 리스트를 잔뜩 적어놓고 언젠가는 저곳을 가보리라 마음먹으며 여행에 관한 상념을 달래는 중, 몇 년 전 기억이 슬그머니 되살아났다.

유럽 출장을 마치고 인천국제공항의 수하물 컨테이너 벨트 앞에서 짐을 기다리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여행 가방 세 개 중 하나가 리모와였다. 은색 리모와, 파란색 리모와, 검은색 리모와 등등 색깔과 크기가 제각각인 리모와 가방이 주인을 기다리며 컨테이너 벨트 위에서 돌고 있던 그 희한한 장면. 리모와가 너무 많다 보니 사이즈와 컬러가 똑같은 제품들이 서로 붙어서 이동하는 장면도 보였는데, 가방 주인들이 헷갈려 하지 않고 자신의 가방을 순식간에 낚아채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앞서 빠져나간 승객 중에는 핸드캐리 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의 리모와 가방을 들고 총총히 사라진 이들도 제법 있었으니, 그쯤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리모와 가방이 여행 업계의 대세가 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순간이었다.

이 일을 경험하고 난 후 리모와에 부쩍 관심이 갔다. 알고 보니 주변에 리모와 애호가가 상당히 많았다. 특히 포토그래퍼나 촬영 기자등카메라를다루는사람들가운데리모와를친근하게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원래 리모와는 카메라 등을 담는 알루미늄 박스로 유명세를 얻은 브랜드다. 튼튼한 데다 습기와 열에 강해 비싼 자재를 운반해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패션이나 마케팅 등 유행의 흐름을 선도하는 사람들도 리모와 가방을 애호했다. 사이즈나 소재, 색깔 별로 리모와를 구입해 여행을 다닐 때는 물론 집안 인테리어 소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리모와는 특히 아시아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최고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리모와는 곧 명품 업계의 큰손 LVMH에게 인수되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화재 현장에서 멀쩡하게 살아남은 알루미늄
리모와는 1989년 독일에서 시작된 브랜드다. 창업자 파울 모르스첵(Paul Morszeck)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브랜드를 시작했으나 2대손인 리차드 모르스첵에 이르러 리모와라는 예쁜 이름으로 지금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무슨 뜻인가 궁금해서 살펴보니 ‘리차드 모르스첵의 트레이드마크’라는 의미의 독일어 ‘Richard Morszeck Warenzeichen)’의 앞 두 글자를 조합해 만든 이름이었다. 자신들이 만드는 제품이 여행 가방 업계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거라는 짐작이 가능한데, 중요한 것은 이 이름을 짓는 시기에 회사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리모와가 초기에 만들던 가방은 그 시절의 여행 가방 대부분이 그렇듯이 가죽과 나무가 주요 소재였다. 튼튼하고 견고하지만 무겁다는 단점이 있었고, 무엇보다 불에 약했다. 어느 날 리모와공장에큰불이나서가죽과목재등주요재료가모두 불에 타버린다. 폐허가 된 현장을 둘러보던 2대손 리차드는 다 타버린 재료들 사이에서 알루미늄 소재의 부속품들만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이후 리차드는 알루미늄 소재에 주목하게 되었고, 리모와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알루미늄 소재의 여행 가방이 탄생할 수 있었다.

혁신과 기능성에 집중하다
리모와는 성공하는 브랜드가 가져야 할 특징적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우선 리모와는 고유한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다. 여행 가방 표면에 좁고 긴 홈을 연속적으로 넣은 그부르 패턴(Groove Pattern)은 멀리서도 한눈에 리모와 가방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요소다. 그루브 패턴이 적용된 직사각 형태의 가방이 완성된 시점이 1950년대라는 것을 살펴보면, 이 디자인이 갖는 보편성과 미학적 완성도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리모와의 그루브 패턴은 2021년 현재에도 모던하고 세련된 여행 캐리어라는 이미지를 얻을 만큼 탁월하다.

여기에 더해 여행 가방이 가져야 할 기능성을 극대화시킨 장치들 역시 리모와 성공의 핵심 포인트다. 알루미늄 케이스부터가 그렇다. 당시 비행기 동체를 만들던 소재를 이용해 여행 가방을 제작했다는 것 자체 혁신이었다. 투박하고 무거운 가죽 가방 대신 가볍고 이동이 간편한, 그러면서도 튼튼한 여행 가방을 만들겠다는 일념에 당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소재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리모와는 세계에서 최초로 알루미늄 가방을 탄생시킨 브랜드다.

리모와가 갖고 있는 ‘세계 최초’ 타이틀은 알루미늄 소재 외에도 몇 가지더있다.여행가방손잡이가지금처럼원하는높이로조절될 수 있었던 것도 리모와가 효시다. 리모와 이전의 여행 가방 손잡이는 버튼을 누르면 튀어나왔다가 들어갔다 하는 단순한 형태였다. 리모와의 손잡이 덕에 여행 가방의 기능성은 한 단계 진화할 수 있었다.

새로운 바퀴의 출현
리모와 가방에 달린 바퀴는 사람들이 이 제품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리모와가 등장하기 전에는 바퀴 두 개가 달린 여행 가방이 대세였다. 하지만 리모와는 네 개의 바퀴가 달린 가방을 세상에 선보였다. 각각의 바퀴는 두 개의 휠을 지닌 형태였으며 360도 회전이 가능했다. 가볍고 부드러우며 경쾌하게 움직이는 리모와 바퀴는 무거운 가방을 끌고 다닐 때 느끼던 부담을 확 덜어주었다. 이 리모와 바퀴 덕분에 공항에서 먼 거리를 걸으며 이동해야 하는 전문 여행객들, 특히 파일럿이나 승무원, 비행기를 자주 갈아타는 비즈니스맨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심지어 리모와는 한쪽바퀴의휠이망가져도나머지휠이바퀴를지탱할수있다.이런 다양한 기능적 장치들 덕에 리모와는 고가의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여행 애호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인기를 누리게 된다.

물론 리모와에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알루미늄 소재로 만든 리모와 가방의 약점은 잘 찌그러진다는 것이다. 비행기 여행할 때 수하물로 부치면 십중팔구 어딘가 패이거나 흠집 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브랜드에 매료되면 이런 약점도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게 브랜드 애호가들이다. 가방에 새겨진 흠집을 개인의 역사성으로 치환시키거나 스티커를 붙여 나만의 캐리어로 탄생시켰다.

여행 가방 전문 브랜드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한 리모와. 현재 여행 업계의 침체로 쉽지 않은 상황을 보내고 있지만, 코로나의 엔딩 이후 가장 주목받을 브랜드 중 하나로 기대해 볼 만하다.

힘H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