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수 재킷의 시작

Barbour

바버(Barbour)는 슬로우 패션의 대표 주자로, 유서 깊은 역사와 풍성한 브랜드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기능적이고 단순하며, 내구성이 뛰어난 옷을 만드는 데 집중한다. 바버를 보고 있으면 옷에 이토록 긴 수명을 부여하는 브랜드가 또 있나 싶다.

더 오래 입을 수 있는 옷

뭔가를 사고 버리고, 다시 사는 일에 죄책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지구가 좀 더 오래 버티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지고, 지속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면서 이런 생각은 더 강해진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방편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지금은 소비가 더는 미덕이 되지 않는 시대다. 패션 업계에서도 이런 경향성이 두드러지고 있다.

슬로우 패션은 유행을 잘 타지 않고, 옷의 생산과 소비 속도를 늦추는 트렌드를 말한다. 빠르게 소비하고 버려지는 SPA 브랜드 옷과 반대 개념으로, 한 번 사면 최대한 오래 입고 헤지거나 낡으면 수선해 입으며, 더 입고 싶지 않을 때는 서로 교환하거나 재판매할 수 있다. 패션은 그 속성상 끊임없이 트렌드를 만들어내야 하며, 사람들이 새 옷을 사야 존재 가치가 있다. 그런데 이런 슬로우 패션을 지향하며 옷을 만들어 팔면 과연 그 브랜드는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 화답하는 패션 브랜드 중 하나가 바버(Barbour)다.

바버는 자신들이 슬로우 패션을 지향한다고 천명하지 않는다. 그저 회사가 처음에 만들었던 방식 그대로 130년간 옷을 만들어오고 있다. 매장에는 매년 신제품이 출시되지만, 유서 깊은 브랜드답게 시그니처 아이템에는 별 변화가 없다. 옷을 판매한 후 관리 방식을 살펴보면 ‘대를 물려 입을 만하다’라는 평을 듣는다. 견고함과 내구성이 좋아 빈티지 패션 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심지어 오래될수록 멋스러운 분위기가 난다. 바버는 영국에서 국민 아이템이고, 우리나라에서는 트렌디한 젊은 남자에게 인기다.

물에 젖지 않은 옷의 효시, 왁스 재킷

바버는 영국의 한 바닷가 마을에서 시작했다. 1894년, 스코틀랜드 칼로웨이 출신의 존 바버(John Barbour)는 최상품의 이집트산 면에 자신이 특별히 고안한 오일 왁스를 발라 방수 천을 만든다. 그는 이 방수 천을 활용해 재킷을 만들어 팔았는데, 영국 북해의 차갑고 습한 바다를 상대로 뱃일하는 어부나 선원에게 좋은 반응을 끌어낸다. 1800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물에 잘 젖지 않은 소재는 혁명과도 같은 아이템이었다. 곧 존 바버는 자신의 제품이 시장성이 있음을 판단하고 잉글랜드 항구 도시 사우스 쉴즈(South Shields)에 첫 번째 매장을 오픈한다.

바버가 영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이 나라 특유의 날씨도 한몫한다. 영국은 하루에도 비가 오고 해가 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며, 춥고 습한 날씨가 오랫동안 지속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방수 재킷이 빛을 발한다. 바버 재킷이 있으면 우산 없이 비를 맞고 걷는 것이 일상이 되고, 아웃도어 활동을 할 때 비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 있다. 바버 옷은 입었을 때 활동하기 편하도록 디자인되었으며, 방수 천이라 보온성도 확보된다. 여러모로 영국인의 라이프스타일과 딱 들어맞았다. 바버는 지금 같은 간절기에 아우터 재킷으로 입기 좋은 옷들을 만들며, 겨울에는 퀼팅 재킷으로 추위에 대비할 수 있다.

수선과 리왁싱 서비스

바버가 만든 재킷이 ‘왁스 재킷(Wax Jacket)’으로 불리며 방수 옷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되자 곧이어 경쟁 브랜드가 등장한다. 하지만 바버 제품은 다른 왁스 재킷에 비해 내구성과 통기성이 뛰어났다. 지금도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나라에서는 브랜드에 상관없이 방수 재킷을 ‘바버 재킷’으로 통칭해 부르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트렌치코트를 ‘바바리코트’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만큼 왁스 재킷의 대명사로 통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바버 왁스 재킷에도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바버 재킷에 특수처리한 왁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성분이 조금씩 사라진다. 왁스가 옅어지면 방수 기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버는 이를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 낸다. 우선 왁스 제품을 따로 판매하는 것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바버의 왁스를 사서 손수 왁싱해 입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은 바버 매장에서 제공하는 왁싱 서비스를 이용하는데, 일정한 비용을 내면 전문적인 왁싱 처리를 통해 다시 새 옷처럼 만들어 준다. 리왁싱뿐 아니라 수선 서비스도 함께 제공함으로써 소비자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옷을 고쳐서 다시 입을 수 있다.

이게 가능한 것이 바버의 지속 가능한 제품 생산 철학이다. 바버는 매 시즌 변하는 유행 트렌드를 좇는 대신 오랫동안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드는 데 주력한다. 그래서 대를 이어 입을 수도 있는 옷으로 유명해진다.

정원사와 낚시꾼의 옷

바버는 재킷뿐 아니라 오토바이를 타는 라이더를 위한 옷을 만든 적도 있다. 본인 자체가 열혈 라이더이기도 했던 던컨 바버는 1936년에 바버 슈트를 만들어 팔았다. 방수 처리가 된 옷은 바람막이 효과를 덤으로 내기 때문에 라이더에게 인기인데, 바버는 1970년대까지 바버 슈트를 필두로 바이크 의류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바버의 인기는 더욱 견고해졌다. 영군 해군이 바버의 방수 재킷을 애용해 그 품질은 인정받았고, 곧 영국 왕실의 공식 인증을 받기에 이른다. 왕실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지금도 영국의 브랜드에게는 큰 업적이자 자랑거리다. 바버는 3개의 공식 왕실 인증를 받아 영국 왕실에 납품하는 제품이며, 로열패밀리들이 바버를 입고 등장해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리기도 한다.

바버 재킷이 가장 빛을 발할 때는 비 오는 날 우산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캠핑이나 낚시, 사냥 등 레저 활동할 때는 두 손이 자유롭게 움직여야 하니 우비를 입을 수밖에 없는데, 이게 또 통기성이 떨어져 여간 불편하지 않다. 바로 이럴 때 바버 재킷이 있으면 순식간에 해결된다. 비에 젖지 않으니 우비 대용이 되며, 특유의 빈티지한 멋을 더해주니 패셔너블해지기까지 한다. 바버는 태생적으로 워크웨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정원사와 낚시꾼의 옷이라는 별칭도 있다. 하지만 신분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영국인에게 어필했고, 전 세계로 뻗어 나가며 인기를 얻었다. 화려함과 고급스러움 대신 지속 가능성에 올인한 바버의 제품은 시간이 흐를수록 매력적으로 변하며, 오래 입을수록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힘HIM